위대한 선수 no.40 카림 압둘 자바
- no.40 카림 압둘 자바
- 2016년 11월 21일
- 2분 분량

NBA의 농구 선수. 본명은 퍼디낸드 루이스 앨신더 주니어(Ferdinand Lewis Alcindor, Jr)였지만, 이슬람교에 귀의하면서 이름을 바꿨다. 신장 219.0cm. 체중 105.0kg.
NBA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히는 레전드로 1969년부터 1989년까지 뛰었으며 통산득점 38,387 점을 기록했는데, 이는 NBA 통산 1위에 해당한다. 20년간 선수생활한 것도 통산 1위였지만, 자바에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는 로버트 패리시가 21년 뛰는 바람에 통산 2위. 그래도 출장 시간은 아직까지 역대 1위이다.
뉴욕 출신으로 농구명문 우클라대학UCLA에 입학, 재학하던 3년동안 전부 NCAA토너먼트를 우승하면서 싹수부터 시퍼랬다. 이 시절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루머는 입학 직후 1학년과 상급생으로 나눠져서 연습경기를 했는데 압둘 자바가 주축이 된 1학년팀이 상급생팀을 발라버렸다. 문제는 그 상급생들이 그 직전해 NCAA 플레이오프에서 우승한 주전 멤버들이었따는 거.
슬램덩크에 나오는 내용이라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사실 카림의 입학 첫해인 1965~66년 UCLA는 토니 진출자체를 못했다. 1963~64, 1964~65 두해 연속 우승을 하긴 했지만 당시 UCLA가 1학년은 정규시즌 출장 금지였고, 2연속 우승을 이끈 주전인 게일 굿리지,월트 해저드[2]가 빠진 65~66의 UCLA 주전들은 1학년보다 무게감이 부족한건 사실이라 카림이 뛰지 않아서 토니에 못나갔다는 말이 아주 틀린말이 아니다.
아무튼 1학년을 마치고 NCAA 토너먼트에 데뷔한 카림의 대학생활은 딱 한마디로 설명 가능하다. 역대 최고의 NCAA 선수. 이시기 UCLA가 NCAA토너먼트를 7년 연속 7연패하는 최전성기를 구가하는 와중에 2년차에서 4년차까지가 압둘자바의 시대였다. 얼마나 사기 유닛이었냐면, 카림이 2학년 시즌 마치자마자, NCAA에서 덩크 금지 룰을 만들 정도. 덩크 슛 항목 참조. 그리고 덩크가 금지당한 이 괴수께서는 손수 스카이훅[3]을 개발해내신다.NCAA는 단기간 리그파괴를 피할수 있었지만 대신 NBA의 빅맨들에겐 20년의 재앙을 선물해줬다. 졸업과 동시에 1969년 드래프트에 참가, 전체 1번지명으로 창단된지 2년된 밀워키 벅스에 지명 됐다. 그러고는 당연히 신인왕 획득. 입단 2년차에 일찌감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지금도 존재감이 없는 밀워키 벅스 역사의 유일한 우승이 이 시기였다. 커리어가 굉장히 길어지고, LA 레이커스 시절의 모습이 많이 방송되어서 기억엔 많이 남아있지만, 밀워키 벅스에서 6시즌을 보냈던 선수이다. 빌 러셀에 치이고, 윌트 체임벌린에 치이는 등 우승에 한끝 모자랐던 은퇴를 앞둔 오스카 로버트슨을 도와 우승을 이뤄냈다.[4]
하지만 미국에서 내로라하는 대도시인 뉴욕에서 태어나 LA에서 학생시절을 보낸 압둘 자바에게 미국 중부지역의 소도시 밀워키는 그에게는 그야말로 따분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우승직후 팀에게 끊임없이 "내가 들어와서 당신들 숙원인 우승도 시켜줬잖아. 나 밀워키에서 할 만큼 했으니, 고향인 뉴욕이나 뉴저지로 트레이드 해줘" 하고 징징 시전.[5] 결국 팀은 그의 소원대로 LA 레이커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그후 밀워키 벅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설명이 必要韓紙?[6]
그러고는 1975년 이적후에는 핵심선수로 뛰다가 1980년 매직 존슨과 제임스 워디가 온 후에는 그들에게 공격을 맡기고 자신은 골밑 수비에 전념하는[7] 런앤건의 골키퍼가 되어 41세[8] 까지 선수로 활약하며 1980년대 쇼타임 레이커스의 주축으로 활약했다. 나이들어서 매직 존슨에게 팀 리더 역할을 물려주기 전까지 레이커스의 제1옵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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