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수 50인 no.10 데이브 코웬스
- no.10 데이브 코웬스
- 2016년 11월 21일
- 3분 분량

빨간 머리의 왼손잡이 데이브 코웬스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위대한 선수들과 비교할 때 개인적으로 눈부신 성적을 올리지는 못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웬스는 꾸준함과 끊임없는 희생 정신으로 보스턴 셀틱스를 2차례 정상에 올렸고, 단신 센터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코웬스는 자신보다 월등한 체격조건을 갖춘 윌트 체임벌린과 커림 압둘-자바, 밥 레이니어를 상대하면서도 빠른 몸놀림과 허슬플레이로 대등한 경기를 펼쳤다. 코웬스는 워싱턴 불리츠(현 위저즈)의 단신 센터 웨스 언셀드처럼 단신의 핸디캡을 잘 극복한 몇 안되는 선수중 하나였다.
코웬스는 1991년 명예의 전당 입성 소식이 전해지자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슈퍼스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나보다 훨씬 훌륭했었던 선수들의 이름을 많이 댈 수 있기 때문에 나를 뽑아준 것이 그저 영광스러울 뿐이다. 자신과 잘 맞는 사람들과 팀을 만나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행운아였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신장이 6-1에 불과했던 코웬스는 고교 농구팀의 헤드코치와 불화를 일으켜 농구를 그만두고 수영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코웬스는 농구할 운명을 타고난 모양이다. 2년만에 5인치가 자란 코웬스는 다시 농구 선수로 복귀했다. 플로리다 주립대에 진학한 코웬스는 서서히 허슬플레이와 리바운드에 눈을 뜨면서 NBA급 선수로 성장하게 된다.
68-69시즌 빌 러셀이 은퇴하면서 보스턴은 그 다음 시즌 34승48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당시 러셀 대신 셀틱스의 골밑을 맡았던 헨리 핀클은 홈 팬들의 엄청난 야유 때문에 은퇴를 고려했을 정도였다. 셀틱스의 단장이던 레드 아워백은 '어디 러셀 없이 셀틱스가 이기나 보자'라는 식의 비아냥을 감수해야 했다.
셀틱스가 밥 먹듯이 우승할 동안 다른 팀들과 팬들은 셀틱스의 몰락을 손꼽아 기다려왔고, 69-70시즌 셀틱스가 무너지자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핀클에 대한 홈 팬들의 저주는 의외로 셀틱스에 생각지못한 선물을 안겨줬다. 24년만에 상위 4위에 해당되는 신인 지명권을 얻은 셀틱스는 당초 예상과 달리 코웬스를 지명했다. 1번 지명권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는 레이니어, 2번 지명권의 샌디에이고 로키츠(현 휴스턴)는 루디 톰자노비치, 3번 지명권의 애틀랜타 호크스는 피트 마라비치를 지명했다.
그 해 드래프트서는 샘 레이시, 제오프 페트리(현 새크라멘토 킹스 단장), 캘빈 머피, 네이트 아치볼드 등 코웬스를 능가하고도 남는 재능있는 선수들이 많았지만 아워백은 코웬스를 선택했다. 러셀 없이 악몽같은 한 시즌을 보냈기 때문에 아워백에게는 듬직한 빅맨이 필요했고, 선택받은 자 코웬스는 기대 이상의 플레이로 셀틱스 왕조 재건에 앞장서게 된다.
지나친 터프함이 오히려 약이 되다
데이브 코웬스를 신인 드래프트서 지명하기 몇달전 레드 아워백 보스턴 셀틱스 단장은 직접 경기장을 찾았다. 아워백은 코웬스의 경기를 보고나서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됐고,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속내를 들킬까 염려하여 코웬스에 무관심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해프타임때 경기장을 빠져나왔다.
코웬스의 첫 시즌은 파울로 점철됐다. 코웬스는 무려 350개의 파울로 리그 1위를 차지했고, 15경기서 파울 아웃됐다. 상대 팀 선수들과 관중들은 코웬스에 대한 원성이 자자했지만 코웬스 덕분에 셀틱스는 전 시즌보다 10승이나 더 챙겼다. 코웬스는 루키 시즌 악에 바친 듯 리바운드를 잡아냈고, 평균 17점·15리바운드라는 성적표를 받은 코웬스는 제오프 페트리와 함께 '올해의 신인'에 뽑혔다.
코웬스의 지나친 터프함은 상대팀의 경계 대상으로 떠올랐지만 이 덕분에 셀틱스는 영광 재현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코웬스는 2번째 시즌 10경기만 파울 아웃됐고, 보스턴은 56승을 기록했다. 코웬스는 73년 평균 20.5점·16.2리바운드로 MVP에 뽑혔고, 셀틱스는 68승을 기록했다. 만약 그 해에 존 하블리첵의 어깨가 탈구되지 않았더라면 보스턴은 뉴욕 닉스에게 우승을 뺏기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 시즌 결승에 진출한 보스턴의 상대는 밀워키 벅스. 코웬스는 시리즈 내내 커림 압둘-자바에게 밀렸지만 운명을 결정지은 7차전서 맹활약했다. 코웬스는 28득점·14리바운드를 기록했고, 보스턴은 팀 역사상 12번째로 NBA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휴비 브라운(현 멤피스 그리즐리즈 헤드코치)은 코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윌리스 리드가 작은 선수라고 말하지만 코웬스는 정말 작은 선수였다. 코웬스는 자신의 잠재력만으로 신체적 불리함을 극복했다. 플로어에 루스볼이 나뒹굴면 그건 어김없이 코웬스 것이었다."
76년 다시 한 번 NBA 정상에 도전하게 된 셀틱스의 상대는 피닉스 선즈. 피닉스에는 보스턴에서 이적한 폴 웨스트폴이 있었다. 이 시리즈는 웨스트폴의 복수전 양상으로 전개됐다. 시리즈 5차전은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기억되고 있다. 셀틱스는 22점차로 앞서고 있었지만 웨스트폴을 앞세운 피닉스의 맹추격을 허용, 승부는 연장에 돌입했다. 3차 연장까지 가는 끝에 128-126으로 승리한 보스턴은 70년대 2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리즈서 코웬스와 폴 사일러스(현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헤드코치)의 리바운드 원투 펀치는 가공할 위력을 발휘했다. 코웬스와 사일러스는 각각 경기당 16개·14개의 리바운드로 무시무시한 프런트 코트 장악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76년은 코웬스 자신에게 매우 불운했던 해이기도 했다. 절친한 친구였던 사일러스가 시즌이 끝난 뒤 덴버 너기츠로 트레이드되자 코웬스는 특유의 열정을 잃어버리고 만다. 잠시 은퇴를 선언했던 코웬스는 78년 하블리첵이 은퇴하고나서 78-79시즌 팀의 헤드코치 겸 선수가 된다. 빌 러셀에 이어 셀틱스 역사상 2번째 일이었지만 코웬스는 2승12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실망감을 안겨줬다.
79-80시즌이 끝난 뒤 2번째 은퇴를 선언한 코웬스는 82-83시즌 팀 동료였던 돈 넬슨(현 댈러스 매버릭스 헤드코치)이 맡고있던 밀워키 벅스에 잠시 몸담게 된다. 그 시즌이 끝난 뒤 마지막이자 3번째 은퇴를 선언한 코웬스는 샬럿 호니츠(현 뉴올리언스)와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헤드코치를 맡으며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코웬스는 기존의 센터에 대한 관념을 송두리째 뒤흔든 선수였다. 코웬스는 특유의 허슬플레이와 거친 모습 때문에 셀틱스 팬들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에게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열정 하나만으로 약점을 극복한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였다. 만약 코웬스가 없었다면 셀틱스의 70년대 영광 재현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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