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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선수 50인 no.6 네이트 아치볼드

  • no.6 네이트 아치볼드
  • 2016년 11월 21일
  • 2분 분량

네이트 아치볼드-선배로는 밥 쿠지, 후배로는 존 스탁턴처럼-는 뛰어난 재능을 지닌다면 키작은 선수도 언제나 경기를 리드할 수 있는 선수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185센티미터의 신장, 73킬로그램의 신체조건을 지닌 아치볼드는 예리한 패스와 볼을 골 근처로 몰아가는 민첩성, 그리고 정확한 슈팅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그는 선수 생활 초기에 한 시즌에 득점과 어시스트 두 부문에서 선두를 지킨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고, 후반에는 챔피언십을 거머쥐었다. 아치볼드의 대학시절을 맡았던 돈 하킨스는 "체력적으로는 힘든 시기도 있었으나 정신적으로는 결코 흔들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최고의 NBA가드가 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했고, 그의 프로 초기를 지도했던 밥 카우지는 "네이트는 소질과 코트비전은 물론, 가장 중요한 이타심까지 갖춘 선수였습니다. 네이트만큼 팀에 영항을 미칠 수 있는 선수는 없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아치볼드는 NBA에 진출하면서 팀동료들의 플레이를 향상시키는데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득점력도 함께 상승시키며 포인트가드 포지션에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다. 아치볼드의 슈팅력과 공격력은 상대선수에게 항상 위협적이었기 때문에 그의 손에 볼이 쥐어지면 상대선수들은 한치의 여유도 없이 수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아치볼드는 뉴욕에서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는 브롱크스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마약과 폭력에 물들어가는 친구들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농구에 몰두했지만 고등학교 2학년때 퇴학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아치볼드는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학교에 입학하여 신입생으로서 농구팀원들을 모았고, 졸업반이 되었을 때는 시장 표창까지 수상하는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학업성적은 그리 좋지않아 농구 명문 입학이 불가능했고 결국 애리조나 웨스턴 커뮤니티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뉴욕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아치볼드는 엘 파소에 있는 텍사스 대학으로 옮겼고 그곳 감독을 맡고 있던 하킨스의 훈련으로 재능을 키워나갔으며, 당시 NBA 신시내티 로열스를 감독하던 전설의 가드 밥 쿠지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쿠지는 한눈에 포인트 가드로서 아치볼드의 장점을 보았기 때문에 주요대학에서 선발되지 않았던 사실이나 신체조건은 무시하였다. 그의 스카웃은 성공적이었다. 70/71시즌에 NBA생활을 시작한 아치볼드는 72/73시즌에 평균득점 34.0점, 어시스트 11.4로 NBA두 부문에서 정상을 달리며 2라운드 선발 선수중 가장 우수한 선수로서 자리매김했다. 또한 아치볼드는 보스턴에 합류하면서 80년대초 셀틱스 부활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래리 버드, 케빈 맥해일, 로버트 패리쉬와 함께 뛰며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충분한 자질을 갖췄고 80/81시즌 우승을 비롯해 3시즌 연속 리그 최고 성적을 기록하게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83/84시즌을 마친 후 은퇴할 때까지 6번이나 올스타로 선발됐으며 16,481득점, 6,47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네이트의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창조력이 있는 선수라면 키가 작은 선수도 NBA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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