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수 50인 no.50 밥 쿠지
- no.50 밥 쿠지
- 2016년 11월 21일
- 4분 분량

밥 쿠지는 '미스터 농구'라는 별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NBA 태동과 함께 리그의 혁명을 일으켰던 장본인이다. 쿠지는 초창기 NBA의 가장 훌륭한 플레이메이커였다.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었던 화려한 플레이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쿠지는 매직 존슨의 출연 이전에 이미 '매지컬한' 플레이를 펼쳤던 인물이다.
쿠지는 8년 연속 어시스트 왕을 차지하며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로 군림했다. 쿠지의 이런 활약은 보스턴 셀틱스 왕조의 알찬 밑거름이 됐고, 이는 리그 8연패라는 수확으로 이어졌다. 프랑스 이민 2세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쿠지는 우연찮은 계기로 농구와 인연을 맺게돼 이내 지역 유명인사가 된다. 쿠지는 탁월한 볼 핸들링 능력으로 소속팀에서 공격의 지휘자 역할을 수행했다.
41년 밥 데이비스가 비하인드 백 드리블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 기술을 상용화시킨 사람은 바로 쿠지였다. 당시 동네에서 농구를 하다가 이런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을 보면 "네가 쿠지인줄 알어?"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쿠지의 대학시절은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완전히 멈춘 상태에서 두손으로 던지는 슛이 지배하던 시절이므로 속공과 다양한 드리블링을 자랑하는 쿠지가 별종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홀리 크로스의 헤드코치 앨빈 '도기' 줄리안은 쿠지의 특이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쿠지의 출장 시간에도 많은 제한을 뒀다.
쿠지는 헤드코치와의 불화로 학교를 그만둘 생각도 했었다. 이런 와중에 쿠지의 운명을 바꾼 것은 팬들이었다. 로욜라 대학과의 경기서 홀리 크로스가 뒤진채 5분도 남지 않자 관중들은 쿠지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줄리안은 어쩔 수 없이 쿠지를 출장시켜야 했고, 쿠지는 버저비터 왼손 훅슛으로 극적인 역전승을 이끌어내며 대학 최고의 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보스턴 셀틱스의 구단주였던 월터 브라운은 보스턴 지역신문과의 인터뷰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쿠지가 없었다면 지금의 셀틱스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쿠지가 뉴욕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면 베이브 루스같은 존재가 됐을 것이다."
쿠지는 50-51시즌 보스턴에 가세하자마자 처음으로 팀을 5할 이상의 승률로 이끌었다. 하지만 최고의 공격리더 쿠지를 보유했다고 해서 보스턴이 바로 우승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스턴은 56년 멜버른 올림픽 금메달에 빛나는 빌 러셀을 맞이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쿠지 역시 선수 생활의 꽃을 피우게 된다.
- 쿠지 4차례 연장전서 진가를 발휘하다
52-53시즌 플레이오프는 밥 쿠지의 진가를 알 수 있는 무대였다. 보스턴 셀틱스는 디비젼 준결승서 시라큐스 내셔널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 시리즈 2차전서 쿠지가 보여준 경기 지배력은 윌트 체임벌린의 100점 경기에 버금가는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쿠지는 정규 경기가 끝날 즈음 이미 25득점을 기록했고, 자유투로 동점을 만들어 승부를 연장에 돌입하게 했다. 1차 연장서 쿠지는 팀의 9점중 6점을 도맡았고, 역시 자유투로 경기의 균형을 맞췄다. 2차 연장서 쿠지는 팀의 4점을 모두 넣었고, 3차 연장서는 8득점을 기록했다. 4차 연장서 보스턴은 99-104로 뒤졌으나 쿠지가 연속 5득점을 기록하는 바람에 동점을 만들었고, 쿠지는 팀의 12점중 9점을 올려 승리의 주역이 됐다.
3시간11분에 걸쳐 치러진 이 혈전서 쿠지는 50득점을 기록했고, 자유투 32개중 30개를 집어넣었다. 당시에는 공격 제한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투의 정확성은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따라서 쿠지가 경기 막판과 4차 연장을 거치며 보여준 정확도와 집중력은 인구에 회자될만한 것이었다.
쿠지 이후 보스턴은 빌 러셀, 토미 하인존, K.C. 존스, 프랭크 램지 등을 영입했고, 마침내 57년 밥 페팃이 버틴 세인트루이스 호크스를 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눌러 첫 우승을 차지했다. 그 이듬해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에 우승을 뺏겼지만 이후 59년부터 66년까지 전대미문의 리그 8연패를 달성하게 된다.
보스턴은 8연패를 하면서 세대교체도 맞게 된다. 62년 가세한 존 하블리첵은 보스턴 왕조의 거듭된 영광을 지켜줄 보배였다. 그러나 초창기 만신창이 꼴지팀 보스턴을 일으킨 쿠지의 역할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인존은 1983년 보스턴 헤럴드와의 인터뷰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쿠지는 공격의 달인이었어요. 수비에서 러셀이 있었다면 공격에서는 '마법사' 쿠지가 있었던 거죠. 그의 손에 공이 가면 나머지 선수들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됐어요. 그가 우리를 어김없이 찾아냈고, 우리가 득점을 올릴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쿠지의 패스는 이내 도달해 있죠."
쿠지는 동시대 스타들을 눈물짓게 하기도 했다. 페팃, 클리프 해건, 가이 로저스, 돌프 셰이즈, 오스카 로버트슨은 쿠지와 셀틱스의 벽에 막혀 번번히 눈물을 흘려야 했다. '마법사' 쿠지는 한마디로 공격의 마스터였다.
- "밥 쿠지가 존 스탁턴보다 5배는 훌륭한 선수다"
NBA 출범 35주년을 맞이해 1980년 11월 미국 농구 기자 협회는 역대 최고 선수 '베스트 11'을 발표했다. 포워드로는 밥 페팃·엘진 베일러·존 하블리첵·줄리어스 어빙이 뽑혔고, 센터로는 조지 마이칸·빌 러셀·커림 압둘-자바·윌트 체임벌린이 선정됐다.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 가드 포지션에서는 오스카 로버트슨·제리 웨스트와 함께 밥 쿠지가 그 이름을 올렸다.
80년대 매직 존슨의 출연으로 가드들의 전성시대가 열리면서 아이재어 토마스, 존 스탁턴이 리그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이미 30여년전 쿠지는 혁명적인 퍼포먼스로 동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탁월한 드리블링과 비하인드 백패스는 같은 팀 동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 정도였다. 오래된 흑백 필름에서 나타나는 쿠지의 드리블과 풋워크는 마치 5명의 개를 피해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영리한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맷 구오카스는 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쿠지는 명석한 플레이를 바탕으로 코트를 지휘했던 선수였어요." 한편 쿠지의 팀 동료였던 톰 하인존은 쿠지와 존 스탁턴의 비교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한다. "쿠지는 스탁턴보다 5배는 훌륭했죠. 쿠지보다 속공을 잘 할 수 있는 선수는 없었어요. 쿠지는 가드의 기본을 세운 사람입니다. 그것은 '먼저 동료들에게 제공할 기회를 노리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자신이 득점한다'는 명제였어요."
보스턴의 헤드코치였던 레드 아워백은 농구 역사상 속공 능력만 놓고보면 매직 존슨만이 쿠지와 동급이었다고 주장한다. 쿠지에 대한 필름이래봤자 고작 1~2분에 걸친 흑백 클립이 남아있을 뿐이기 때문에 혹자들은 쿠지의 스피드 능력을 의심하고, 드리블도 한 손으로만 할 수 있었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곤 한다. 그러나 13세때 쿠지는 나무에서 떨어져 오른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왼손으로 드리블하는 방법도 그 때 익혔다고 한다.
어린시절 뉴욕 닉스의 볼 보이였으며 지금까지도 최고의 NBA 캐스터로 추앙받는 마브 앨버트는 "쿠지는 50년대 리그 최고 인기선수였다"고 말한다. 구오카스가 60년대말 신시내티 로얄스의 선수로 뛸 당시 헤드코치였던 쿠지는 속공을 매우 강조했다고 한다. "밥은 자신이 선수로 뛰던 시절 얘기를 해주곤 했어요. 당시 셀틱스는 최고 속공팀이었죠. 밥은 하인존 같은 선수가 더 빨리 뛰게 하기위해 선수가 있는 위치보다 5인치나 멀리 공을 던졌다고 합니다."
쿠지는 웨스트나 로버트슨이 등장할 때까지 리그를 호령했던 가드며 동시대에 그 어떤 선수도 비교될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 한 전문가는 53년부터 60년까지 어시스트 1위를 기록했으며 52년부터 60년까지 계속 All-NBA First Team에 선정됐던 쿠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람들은 네이스미스 박사가 농구를 발명했다는 것보다 쿠지가 농구를 예술의 경기에 오르게 했다는 사실에 더 공감한다."
- 포인트가드 쿠지 리그를 지배하다
1963년 3월18일(한국시간) 보스턴 가든은 떠나가는 영웅을 위한 마지막 잔치로 분주했다. 팬들은 "우리는 쿠지를 사랑한다"를 외쳤고, 기립박수는 끊일줄 몰랐다. 이 날은 밥 쿠지의 마지막 정규 시즌 경기였고, 팬들은 쿠지에게 아낌없는 경의를 표했다.
63년 파이널은 보스턴과 레이커스의 대결이었는데 쿠지는 6차전 4쿼터서 발목 부상을 당해 동료들의 부축을 받으며 벤치로 향했다. 쿠지는 경기 막판 아픈 발목을 이끌고 코트에 돌아와 동료들의 승리 욕구를 고취시켰고, 결국 셀틱스는 112-109로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63년 은퇴한 쿠지는 대학 헤드코치를 거쳐 69-70시즌 41세의 나이로 NBA에 복귀, 7경기에 출장했다. 그는 헤드코치로써 부진한 팀(당시 신시내티 로얄스) 성적 향상과 관중 동원을 위해 선수로 돌아왔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시즌 티켓이 77%나 더 팔리며 쿠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70년에는 네이트 '타이니' 아치볼드(위대한 50인 아치볼드 편 참조)를 드래프트에서 뽑기도 했다. 쿠지는 로얄스에서 141승209패라는 비교적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한 뒤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쿠지는 74년부터 셀틱스의 경기를 중계하며 보스턴과의 인연을 다시 이어갔다. '농구의 원리와 기술'이라는 책을 집필했던 쿠지는 '아메리칸 사커 리그'의 커미셔너로 활동하기도 했다. 쿠지는 유럽과 아시아를 순회하며 농구 클리닉을 개최, 농구 저변확대에 이바지했다.
쿠지는 공격제한시간이 없어서 매우 느슨했던 NBA 농구에 새 바람을 일으켰던 선구자다. '속공의 달인' 쿠지는 50~60년대에 걸쳐 활동했던 선수지만 그 스타일은 오히려 80·90년대에 가까웠을 정도로 시대를 앞서갔던 인물이다.
54년부터 10년간 선수 생활을 했고, 올스타전에 5번 출장했던 진 슈는 쿠지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쿠지는 공을 가졌을때 매우 빛나는 선수였다. 그는 속공의 묘미를 관중들에게 선사했고, 속공을 이용해 득점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쿠지는 포인트가드로써 리그를 지배한 거의 최초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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