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수 50인 no.46 피트 마라비치
- no.46 피트 마라비치
- 2016년 11월 21일
- 11분 분량

1.`피스톨` 피트 마라비치의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는 내가 농구를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셨다. 7살 때, 아버지는 날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피트, 난 일주일에 96달러를 벌고 있다. 널 대학에 보낼 방법이 없구나. 그렇지만, 만약 네가 나에게 농구를 배운다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거야. 아마도 언젠가 너도 나처럼 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거다. 챔피언쉽을 차지하는 팀에서 뛰게 될 것이고, 넌 챔피언 반지를 얻게 될거야.' 라고 말이다"
피트 마라비치는 천재가 아니었다. NBL 선수 출신인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왜소한 몸을 갖고 태어난데다가, 특별히 농구에 대한 감각이 천부적인 것도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농구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고작 5-2. 90파운드 밖에 안되는 허약한 소년이었다.
그가 신체적인 핸디캡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연습밖에 없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트는 매일 같이 피나는 연습을 했다. 재능이 부족하다면 노력으로 극복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또래 아이들이 뛰어노는 동안 아버지와 밤새도록 농구 연습에 매진했다. 이것은 ‘꿈은 네가 선택한 도전’, ‘고통이 클수록 발전은 크다’ 라며 아들을 격려했던 프레스 마라비치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피나는 노력이 쌓이고 쌓이면서 마침내 피트는 진정한 농구선수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난 여름 내내 하루 6간에서 10시간 정도 연습했다. 내 친구들이 호수로 수영하러 갈 때, 난 40도에 육박하는 체육관에 머물면서 아버지께서 '농구 숙제'라 부르셨던 훈련을 했다. 난 14살 때까지 농구공을 안고 잠을 잤다."
"난 농구공을 들고 텅빈 극장에 들어가,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카펫이 깔린 복도에서 드리블 연습을 했다. 난 마을에서부터 매일 5마일 정도 되는 거리를 드리블로 다녔다. 내가 자전거를 샀을 때, 난 자전거를 타면서 드리블 하는 법을 배웠고, 후에는 자동차 뒷 자석에 앉아 (드리블을 하며) 노닥거렸다."
피트 마라비치가 농구 선수로 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신체능력을 물려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운동능력을 물려 받지 못한 대신, 승리를 향한 열정과, 자신감, 그리고 끝없는 도전정신을 물려 받았다. 그런 정신적인 면에서의 가르침은 키가 크다고, 운동능력이 뛰어나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도 갖지 못한, 피트만의 재능이었다. 한 편, 그 당시의 농구계는 갈수록 보수화, 정형화 되고 있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팀플레이와 인사이드 공격이 강조되기 마련이었지만, 프레스는 과감하게도 자신의 아들에게 철저한 개인기 향상과 외곽슛 강화를 위주로한 훈련을 시켰다. 덕분에, 피트가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테크닉으로 피트를 능가하는 선수는 단 한 명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프레스가 피트의 숨겨진 재능과 그의 장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길러주지 않았다면, 피트가 그렇게 위대한 선수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재능을 파악하고 꿈을 심어준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믿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기나긴 훈련을 묵묵하게 수행했던 피트. "피스톨" 피트는 두 부자의 신뢰와 애정이 만들어낸 전설의 상징이었고, 그 전설은 피트가 LSU에 입학하면서 마침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2.NCAA 역사상 최강의 공격수였던 피트 마라비치
NCAA 통산 득점 1위 :3667점 NCAA 통산 평균득점 1위 : 44.2 ppg NCAA 통산 필드골 성공/시도횟수 1위 : 1387/3166 NCAA 통산 프리스로우 성공/시도횟수 1위 : 893/1152
한 게임 최다득점 2위 : 69점 한 게임 최다 프리스로우 1위 : 30/31 최다 경기 50득점 이상 기록 1위 : 28회
시즌별 평균득점 역대 1-3위 랭크 * 1위 - '70 44.5 ppg * 2위 - '69 44.2 ppg * 3위 - '68 43.8 ppg
1968-'70 3년연속 All-America 1st team (AP, UPI, Sporting News 선정) 1970 년 올 해의 선수 (Sporting News) 1970년 네이스미스 어워드
마침내 스카웃의 계절이 돌아오고, 고교시절 그의 플레이를 눈여겨 보고 있던 농구 명문 노스캐롤라이나를 필두로 한 많은 대학들이 피트에게 적극적인 러브콜을 보내기 시작했다. 항상 문제로 지적되었던 피트의 키가 졸업반 때 부쩍 자라 6피트2인치 가까이 자라났던 것도 큰 이유였다. 동 포지션의 평균키 정도로 성장한 피트에게 이제 '단점'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피트가 노스 캐롤라이나 주립대, 혹은 당대 최강이었던 켄터키나 UCLA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피트가 선택한 곳은 그다지 강호라고 볼 수 없는 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이었다. (피트가 LSU로 진로를 결정한 것은 오로지 아버지를 위해서 였다.) 당시 NCAA에서는 신입생은 시합에 나설 수 없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 때문에, 피트는 1학년 때는 시합에서 뛸 수 없었지만, 이미 그는 1학년 때부터 학교 제일의 스타였다. 피트의 인기가 어느정도였냐하면, 전통적으로 풋볼팀이 강세였던 LSU에서 농구팀을 no.1으로 만들었으며, 시합이 시작되기 전 Warm-up 타임때, 피트의 플레이를 보기 위해 온 학생들로 스탠드가 가득 찰 정도였다. (물론, 본 시합이 시작되면 썰물 빠지듯이 그들은 사라져버렸다..)
그들의 기대와 관심대로, 피트는 본격적으로 시합에 나선 2학년 때부터 NCAA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졸업할 때까지 매 해 득점왕과 퍼스트 팀은 그의 차지였고, 팀을 20승 8패로 이끈 졸업반 때는 마침내 전미 최고의 선수로 뽑히게 된다. 전설의 가드 밥 쿠지와 딕 맥과이어를 보는 듯한 패스와 할렘 글로벳로터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현란한 드리블,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지 못했던 최고의 슈팅능력까지...
피트는 대학 최고의 선수였으며, 그가 선수로 활약하던 시절에 3점슛 제도가 있었다면 평균 50점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러나, 피트는 단순한 스코어러가 아니었다. 그는 작은 신장임에도 불구하고 평균 6.4개의 리바운드를 기록했으며, 매 시합마다 5.1개의 어시스트를 배달했던 올어라운드 플레이어였다. 현란한 플레이의 바탕에는 완벽할 정도로 다져진 기본기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탁월한 도전 정신과 긍정적인 마인드는 그를 NCAA 역사상 전무후무한 "별"로 자리매김하게 인도하였다.
3.피트 마라비치의 NBA선수 시절 주요기록
- NBA All-Rookie Team (1971) - All-NBA First Team (1976, 1977) - All-NBA Second Team (1973, 1978) - Five-time NBA All-Star (1973, 1974, 1977-1979) - Scored 15,948 points (24.2 ppg) in 658 games - Led the NBA in scoring (31.1 ppg) in 1977, his career best - Career-high 68 points (12th best in history) vs. N.Y Knicks on Feb. 25, 1977 - Led the NBA in most field goals attempted in 1974 (1,791) and 1977 (2,047) - Shares NBA single-game record for most free throws made in one quarter (14) on Nov. 28, 1973 against Buffalo and most free throws attempted in one quarter (16) on Jan. 2, 1973 against Chicago - NBA 50th Anniversary All-Time Team (1996)
물론 NBA에서 30점이 넘는 평균득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의 전설적인 대학 생활을 생각하면 그의 NBA 기록은 오히려 초라한 편에 속한다. 딱 10년을 채웠을 뿐인 짧은 커리어는 통산 득점 순위에서 그가 상위권에 랭크되지 못하게 발목을 잡았고, 우승 경험이 없다는 점은 그를 평가절하시키는 데 중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소포모어 시즌때 2년차 징크스로 고생했던 점이나, 동료들로부터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점, 뛰어난 득점력과 패싱력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그 재능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받기도 하지만, 분명 그는 지금까지 NBA 팬들의 뇌리속에 가장 화려하고 뛰어난 테크니션 중의 한 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화려한 플레이를 단편적으로나마 접할 수 있는 영상매체 중에 The NBA 100 Greatest plays 라는 동영상이 있다. 2001년까지 덩크,앨리웁,어시스트,블락등의 10가지 항목에서 1위-10위까지 올타임 베스트 플레이를 선정한 동영상인데, 그 동영상의 [Move] 항목에 피트의 플레이가 포함되어있다. 6위에 랭크된 그의 플레이는 제이윌이 재현해냄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해진 동작으로, 페네트레이션 도중에 비하인드 백패스 페이크를 하고 레이업으로 마무리 하는 동작이다. 화려함에 익숙해진 요즘 팬들도 처음 제이윌의 플레이를 봤을 때 경악했었는데, 70년대엔 어떠했겠는가? 뿐만이 아니다. 그는 밥 쿠지가 선보였던 모든 패스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해서 보여준 훌륭한 패서였으며, 가장 아름다운 비하인드 백 더 드리블을 구사하는 선수였다. 레그 스루 드리블 중 다리 사이로 그대로 패스 하는 모션은 그의 전매특허였으며, 스티브 내쉬보다 더더욱 아크로배틱한 레이업을 밥먹듯이 성공시키는 Show-man 이었다.
은퇴하기 전 마지막 시즌에서 그는 15개의 3점슛을 던져 10개를 성공시켰다. 만약, 리그가 더 일찍 3점슛 라인을 제정하고 피스톨이 본격적으로 3점을 던졌더라면 그는 분명 40 PPG에 가까운 평균득점을 기록했을 것이다. 피스톨은 농구에 관한한 모든 것을 할 줄 아는 선수였고, 긴 레인지의 정확한 슛 역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드리블링으로 코트를 종횡무진하면서 제이윌, 매직같은 패스를 찔러주고 그와 동시에 언제나 리그 최상위권에 랭크된 득점력은 그가 얼마나 특별한 선수였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고 생각된다. 팀내 다득점 스코어러가 세명이나 있던 애틀랜타 시절, 득점뿐만이 아니라 리딩과 수비까지 총 지휘해야 했던 뉴올리언스 재즈의 원맨 팀 시절, 마지막으로 부상으로 인해 벤치 멤버로 뛰었던 보스턴 시절까지... 돌이켜 보면 언제나 그는 마음놓고 기량을 발휘하여 득점과 패스에 집중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부상과 핸디캡 속에서도 그는 리그 득점왕을 차지하고 퍼스트 팀에 선발되었으며 가장 사랑받는 올스타였다. 그가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팀에서 뛸 수 있었더라면 NBA 역사는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지도 모른다. 피스톨은 그럴만한 능력이 되는 당대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스코어러이며, 동시에 가장 화려한 패스를 가진 최고의 드리블러였다. Show-time은 80년대 매직의 등장과 함께 시작되었다고들 말하지만, 피스톨의 게임 역시 조금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show-time 플레이로 가득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진정으로 농구를 즐길 줄 아는 선수이기도 했다. 게임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절대로 평범하게 몸을 풀지 않았다. 손가락 끝으로 볼을 돌리기 시작해서 - 마치 and1의 그것처럼 - 온 몸을 이용해 다양한 기술을 선보였으며, 종종 하프라인 점프슛을 연속으로 성공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그의 모든 행동은 농구를 사랑하고, 팬을 진정으로 아끼는 그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팬들은 그의 그러한 프로의식과 즐기는 게임을 사랑했고,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매료되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역대 최고의 테크니션이자 쇼 맨으로 평가하는 이유다.
4.피트 마리비치에 NBA 시즌별 리뷰
1970-'71 Season
밥 레이너, 루디 톰자노비치에 이어 1라운드 종합 3번으로 애틀랜타 호크스에 지명되어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이었던 1.9 mil을 받는 새파란 루키에게 자존심이 상한 베테랑들은 그를 은연중에 따돌렸고, 선배들의 보살핌 속에 리그에 적응해야 할 루키 피트는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애틀랜타에는 이미, 당시 리그에서 정상급 슈터로 인정받고 있었던 루 허드슨이나 훗날 2만득점 14,000리바운드를 달성하는 강력한 인사이더 월트 벨러미가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다. 또한, 월트 해저드라는 검증된 플레이메이커가 있는 상황에서 피트가 보여주는 창조적인 패스는 시기심만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트는 23.2 ppg로 리그 득점 9위에 랭크되는 활약을 펼치며, 올 루키 팀에 선정 되는등 비교적 성공적으로 루키 시즌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팀성적은 전 해의 48승보다 오히려 12승이나 떨어진 36승으로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해였다.
1971-'72 Season
소포모어 징크스에 시달린 피스톨은 모두 16게임을 결장했다. 평균득점은 19.3 ppg로 엄청나게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성적이었지만, 대학농구의 전설 피트에겐 치욕스러운 성적이었다. 피트가 부진한 사이 기다렸다는 듯이 루 허드슨이 24.7ppg로 팀 득점을 리드하며 에이스 자리를 되찾았고 벨러미도 18.6ppg로 뒤를 제대로 받쳤다. 애틀랜타는 전년도와 동일한 36승을 거두었고, 플레이오프에서 피트는 슬럼프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보스턴에게 패해 떨어질 때까지 6게임에서 피트는 27.7ppg를 기록한다.
1972-'73 Season
리그에 적응을 마친 피트는 본격적으로 리그 정상급 선수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더 건강해진 몸으로 부상없이 시즌을 마친 피트는 26.1 ppg로 리그 득점 5위에 랭크되었으며, 커리어 하이인 6.9 어시스트를 기록하게 된다. 46승 36패로 팀을 이끈 피트는 All NBA 2nd Team 멤버로 선정되었으며, 생애 최초로 올스타에 선정되어 예의 화려한 테크닉을 선보이기도 했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 시즌에 루 허드슨이 27.1ppg로 리그 4위에 랭크되었다는 점이다. 사이가 안 좋았던 이 듀오가 리그 역사상 득점 5위안에 동시 랭크된 6번째 듀오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코비-샤크를 연상시킨다.) 화려한 테크닉으로 언제나 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피스톨과 가장 효율적이고 쉽게 득점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허드슨의 대조적인 콤비는 애틀랜타가 전국적인 인기팀으로 자리매김하는데 큰 공헌을 하기도 했다.
1973-'74 Season
애틀랜타에서의 마지막 시즌. 피스톨은 27.7 ppg를 기록하며 데뷔이후 최고의 활약을 펼쳤지만 팀은 35승 47패로 데뷔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30.6 ppg를 기록한 밥 맥카두에 이어 리그 득점 2위에 랭크된 피트는 생애 2번째 올스타전에서 22분동안 15점을 몰아넣으며 이름값을 한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고, 1,2년차 때와 다름없이 나빠진 팀 분위기 때문에 피트는 팀에대한 애정이 점점 엷어져만 가고 있었다.
1974-'75 Season
Expansion Draft와 함께 리그에 새로 발을 들여놓은 뉴올리언스 재즈. 그들은 팀을 대표 할 만한 프랜차이즈 플레이어가 필요했고, 그들은 루이지애나 주 역사상 최고의 선수인 피트를 원했다. 재즈는 피트를 얻기위해 빈 머닝거, 밥 커프만 미래의 1라운드 지명권 2장과 2라운드 지명권 2장이라는 엄청난 출혈을 감수했고, 결국 루이지애나주의 전설은 홈 팬들 앞에서 다시 환상적인 그의 플레이를 선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팀 웍은 좋지 않았을지라도 탄탄한 팀 멤버가 곁에 있었던 애틀랜타 시절과 달리 피트는 혼자서 고군분투해야했고, 덕분에 득점은 2년차 이후 최저인 21.5ppg를 기록하지만 리바운드와 스틸에서 통산최고를 기록하고 어시스트도 6.2개를 기록한다. 져니맨들과 실력이 검증되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 이 시즌에만 무려 22명이나 재즈를 거쳐갔고, 결국 23승 59패의 성적으로 리그 최하위에 랭크되며 시즌을 마감한다.
1975-'76 Season
신생팀의 한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시즌 내내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린 피트. 62게임 출전에 그치긴 했지만 데뷔 후 최고인 45.9%의 필드골 성공률과 밥 맥카두, 커림 압둘자바에 이어 리그 3위인 25.9ppg를 기록한다. 팀 성적은 전 해보다 15승이나 향상된 38승 44패. 뉴올리언스는 피스톨의 전 소속팀 애틀랜타를 센트랄 디비젼 최하위로 끌어내리며 탈꼴찌에 성공했다. 사실상 원맨팀이나 다름없던 뉴올리언스를 이끈 공로로 피스톨은 생애 첫 1st 팀에 선발되게 된다.
1976-'77 Season
77시즌은 피트 최고의 한 해였다. 31.1 ppg로 마침내 득점왕에 오른 피트는 13경기에서 40득점 이상을 기록했으며 총득점, 필드골 시도횟수, 프리스로우 시도횟수에서 리그 1위를 마크한다. 2월 25일, 당시 최고의 디펜더였던 월트 프레지어의 밀착 마크를 상대로 68점을 폭발시키며 강인한 인상을 남긴 피스톨은 다시 한 번 올스타로 선발되었으며, 2년 연속 1st 팀 멤버로 선정된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팀은 호크스에 이어 디비젼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혼자서 지나치게 많은 짐을 져야 했던 피트는 언론의 표적이 되었고, 이기적이라는 비평에서부터 독불장군이라는 비난까지 들끓었다. 피트는 다만 언제나처럼 묵묵히 슛을 던지고 드리블로 상대를 제치고, 패스를 했다. 그것은 소리없는 그의 항변이었다.
1977-'78 Season
부상으로 한 쪽 무릎을 수술한 피트는 아킬레스 건염으로 인해 다시 반대쪽 무릎을 수술해야 했다. 완쾌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팀성적의 악화를 우려해 무리하게 복귀한 피스톨은 버팔로와의 시합에서 전매특허인 공중 레그 스로 패스를 구사한 이후 착지하다가 다시 부상을 입게된다. 32게임에 결장한 피스톨은 리그 득점왕 최소 규정을 채우지는 못했지만 3위에 해당하는 27ppg를 기록했고, 올스타 선정과 함께 NBA 2nd 팀 멤버로도 선정된다. 한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가운데 재즈는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고, 39승 43패였던 그들의 성적은 플레이오프 진출에 단지 2게임 모자라는 성적일 뿐이었다.
1978-'79 Season
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한 시즌 이상 푹 쉬어야 회복이 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안은채 막판 플옵 경쟁에서 고군분투했던 피스톨의 무릎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다. 거의 모든 스탯이 총체적으로 하락한 피스톨은 단지 49게임만을 뛰며, 22.6 ppg를 기록하는데 그쳤다. 팬들의 사랑은 여전해서 올스타게임에도 출전하긴 했지만, 마치 거짓말처럼 그에게서 더 이상의 화려한 플레이를 볼 수는 없었다. 22.6 ppg라는 성적도 다른 득점원이 없다는 뉴올리언스의 상황과 천부적인 센스와 가혹할정도로 오랜 시간 훈련했던 기본기 때문에 가능한 기적적인 성적이었다. 피트는 느려졌고, 예전처럼 번뜩이는 패스도 없었으며 팀은 결단을 내려야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1979-'80 Season
유타로 연고지를 옮긴 재즈. 연고지의 변화와 함께 이 팀에도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부상회복에 전념하며 이번 시즌을 벼르고 있었던 피스톨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출장시간은 형편없이 줄어들었으며, 팀은 LA에서 이적한 애드리안 덴틀리(AD)를 팀의 에이스로 내세우고 있었다. (댄틀리는 이 시즌에서 28ppg를 기록했다.) 마침내 시즌 시작 17게임만에 피스톨은 웨이브 공시되었고, 5일후 전통의 강호 보스턴에서 버드를 도와줄 조력자로 피스톨을 낙점한다. 원한다면 주전으로 뛸 수도 있었지만, 피스톨은 자신의 무릎이 완전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그는 스스로 벤치멤버로 기용할 것을 요구했으며, 탄탄한 기본기와 안정된 슈팅으로 보스턴의 벤치를 한층 강화시켜주었다. 보스턴에서 그는 11.5 ppg를 기록했고, 가끔씩 무서운 집중력으로 분위기를 반전시키곤 했다. 보스턴은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지만 필라델피아에 4대 1로 무릎을 꿇었고, 그것이 피스톨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컨퍼런스 파이널 경험이었다.
이듬 해, 피트는 전격적으로 은퇴를 결정한다. 그의 무릎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으며 그는 많이 지쳐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슈퍼 라이벌 버드와 매직의 등장으로 팬들은 피스톨의 은퇴를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NBA는 전례없는 흥행을 거두기 시작했고, 마치 피스톨이라는 플레이어가 없었던 것처럼 Show-time 과 패스에 관한 찬사는 모두 매직에게로 옮겨졌다. 그렇게 잊혀져가던 피스톨은 85년 유타의 영구결번, 86년 명예의 전당 입성으로 잠시 회자되었을 뿐 큰 관심을 끌지는 못한다. 88년 1월 5일. 친구와 농구 이야기를 하고 있던 피트는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인해 40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만다. 위대한 스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많은 사람들이 애도의 뜻을 표했으며, 형편없는 팀성적과 플레이오프 기록에도 불구하고 1996년, 역사상 가장 위대한 50인에 당당히 선정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의 선정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5.피트 마라비치의 화려한 선수시절 그 이후..
전통적으로 스포츠스타들에게는 항상 Role-model 로서의 책임이 요구되어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단지 운동 선수일 뿐인 그들에게 도덕적, 인격적 성숙을 요구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은 그들처럼 되고 싶어하는 많은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들의 영웅이 마약을 하고, 온몸을 문신으로 뒤덮고 폭력사건에 밥 먹듯이 연루된다면 그들이 어떻게 성장하겠는가? 이와 관련해 한 MJ의 팬이 남긴 말은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다. "난 마이클을 좋아합니다. 그는 애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요소가 전혀 없거든요. 승리를 향한 끝없는 도전과 열정으로 가득한 선수고, 게다가 문신도 없죠."
내가 수 많은 전설적인 선수들 중에 우승 경험도 없고, MVP로 선정된 적도 없는 피트를 존경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150cm 45kg의 왜소한 체격으로 농구를 시작한 피트 마라비치의 인생은 끝없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신체적 핸디캡과 싸웠고, 다음엔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의 편견과 맞서 싸워야 했다. 기적적으로 6-5 까지 성장하여 신체적 핸디캡이 더 이상 없어졌을 때, 그는 그의 기상천외한 플레이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던 - 피스톨의 대학 초기, 루이지애나 주의 지역 신문에서는 그가 할렘 글로벳로터 처럼 '저급한' 플레이를 펼친다고 비난했었다 - 기성 농구계와 언론에게 자신의 플레이가 겉멋에 치중한 속 빈 플레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내야만했다. 애틀랜타 시절엔 팀 메이트의 도움을 받지 못한채 홀로 플레이해야 했고, 유타 시절엔 홀로 팀을 이끌면서 독선적이라는 비판을 온 몸으로 받아내야 했다. 이러한 모든 역경속에서도 피트는 단 한번도 좌절한 적이 없다. 그는 힘든 상황에 쳐해 있을 때도, 잘생긴 그의 외모만큼이나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팬들은 언제나 피트를 응원했고, 또 사랑했다. 비록 치명적인 무릎 부상으로 인해 팬들 곁을 떠나고 말았지만,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진정한 도전정신의 소유자이며 신사적인 선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나 또한, 이런 그를 사랑한다. 그는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전이었던 사람이며, 승리만큼 많은 패배를 경험했지만 절대로 좌절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그런 삶의 태도와 깨끗한 이미지를 나는 사랑한다.
사실, 피트 마라비치의 인생에 있어서 NBA가 가장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하루에 10시간씩 훈련을 하며 농구공을 안고 잠들었던 어린 시절이나, 신체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31ppg를 기록하며 종횡무진했던 고교 시절이 더 큰 의미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피트에게 있어서 NBA란 이미 "완성된" 그의 플레이를 팬들 앞에서 선보이고, 그들과 함께 '즐기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우승할 수 없는 팀에서 플레이했던 피트는 그 자신이 나중에 밝혔듯이 대학 시절처럼 뚜렷한 목표 - 챔피언쉽 - 를 설정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LSU 시절의 영상과 재즈 시절의 피트를 비교해 본다면 오히려 LSU 시절, 그의 눈빛이 더더욱 승리에 굶주려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개인적인 기량은 정점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팀은 승리하지 못했던 그의 재즈 시절은 나 같은 팬에겐 여전히 애증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윌트 프레지어를 매치업 상대로 기록한 68점은 보스턴을 상대로 63점을 기록한 MJ의 기록에 전혀 뒤질 것이 없는 뛰어난 기록이지만, 나는 그 시합 내내 수준 미달의 동료들을 거느리고 외롭게 싸워야 했던 그의 지친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조금만 더 뛰어난 동료들과 함께할 수 있었다면.. 조금만 더 강 팀에서 피스톨이 뛸 수 있었다면.. 이런 생각은 항상 나를 자극한다. 그만큼 피트는 불운한 천재였다.
Commentair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