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수 50인 no.36 조지 거빈
- no.36 조지 거빈
- 2016년 11월 21일
- 2분 분량

NBA 농구 선수. 데이비드 로빈슨과 팀 던컨의 시대가 오기 전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전설이었으며, 막강한 득점력과 아이스맨이라고 불릴 정도의 무표정한 얼굴이 트레이드 마크였던 선수다. 12년 연속 올스타 선정, 3년 연속 올스타 최다 팬 득표, 3년 연속 (총 4년) 득점왕, 커리어 평균 야투 성공률 52%, 2년 연속 MVP 득표 2위, 7번의 All-NBA (퍼스트 팀 5회) 선정, 명예의 전당 헌액, 위대한 50인 선정 등등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많은 영광을 누렸고 역대 슈팅가드 순위에서도 항상 5위 안에 이름을 보이는 NBA 전설 중의 한명이다
거빈의 어린시절은 상당히 불우했는데, 디트로이트의 빈민가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거빈은 평생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몰랐다. 거빈이 태어날 무렵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가버렸기 때문. 하지만 거빈의 어머니가 정말 열심히 막노동을 하면서 6남매를 키워, 그런 형편에서도 밥을 굶지는 않았다고 한다. 빈민가에서는 수많은 유혹과 위협들이 있었지만 거빈은 어머니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농구선수로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마침 173cm였던 키가 단 몇개월만에 193cm가 되는 행운도 있었고, 당초에 키가 작다는 이유로 농구부 감독에게는 퇴짜를 맞았지만 거빈을 불쌍하게 여긴 코치로부터 농구 수업을 받는 특권도 얻었다. 그리고 심성이 착했던 거빈이 마음에 들었던 중학교 경비 아저씨의 도움으로 야간에도 체육관을 써서 열심히 훈련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거빈은 매일같이 어둡고 텅빈 체육관에서 미친듯이 슛을 쏘고, 쏘고, 또 쏘면서 자신을 갈고 닦았다. 몇년동안이나.[3] 훗날 스스로 "오직 하느님만이 내가 노력한 그 나날들을 알아주셨다." 고 할만큼, 거빈은 묵묵히 달리고, 쏘고, 또 달렸다.
그렇게 노력한 대가로 대학 시절의 거빈은 평균 20득점은 훌쩍 넘는 뛰어난 선수가 되었다. 그렇게 거빈은 선수인생로서 꽃을 피워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날, 상대 선수가 거빈이 너무나도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머니를 대상으로 트래쉬 토크를 시전하자, 격분한 거빈은 그 선수에게 주먹질을 날렸다. 경기 중 폭력사태라는 큰 일이 생기자 거빈의 대학감독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거빈 역시 NCAA 선수 자격 박탈이라는 엄청난 중징계를 받았다. 그렇게 노력한 나날들이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NBA 선수로서의 꿈을 접을 수 밖에 없게 된 거빈은 EBA라는 마이너리그에서 밥벌이를 위한 선수생활에 나섰다. 그런데, 거빈이 나섰던 경기장에는 ABA리그의 버지니아 스콰이어스 팀 소속 스카우터가 우연찮게 나와 있었던 참이었고, 스카우터는 거빈의 뛰어난 기량에 매력을 느껴 거빈을 스카우트 했다. 그렇게 입단한 버지니아 스콰이어스에는 줄리어스 어빙이 있었다. 당시 어빙은 30득점 이상을 평균으로 기록하는 엄청난 선수였고, 거빈은 이를 묵묵히 뒷받침하는 백업으로 23분의 평균출장시간 동안 14.1득점이라는 괜찮은 기록을 남겼다. 이후 어빙이 뉴욕 넷츠로 이적하자 거빈은 팀의 주전 스몰포워드로서 대단한 활약을 하며 ABA 최고의 스타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결국 샌안토니오 스퍼스는 이런 거빈을 1973~74시즌 중반에 데려오게 되었다. 이후 ABA가 NBA에 합병되면서 NBA 팬들은 이제 ABA 슈퍼스타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샌안토니오에서 거빈은 평균 20득점 이상은 기본으로 기록하며 슈팅 가드로서는 최초로 3연속 득점왕에 올랐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하였지만 사실 전형적인 슈팅 가드는 아니었다고 한다. 당시 스퍼스의 시스템은 1가드-3포워드-1센터였고 거빈은 스코어링 스몰 포워드의 역할을 소화해 내었다. 거빈은 다재다능 해야 가능한 스몰 포워드의 역할을 골 밑, 미드레인지, 장거리슛 등등 모든 방면의 공격력으로 커버했다. 사이드에서 오프볼-무브 중에 패스를 받아 골 밑 득점을 하거나, 포스트업에서 양 손을 모두 사용하는 런닝 훅슛으로 득점을 했고 외곽에서 공을 잡으면 드라이브 인 해서 장신 인사이더들이 손도 못 댈 핑거롤 레이업으로 득점을 하기도 했으며, 컷인 능력도 뛰어났고, 아무리 수비가 2중 3중으로 타이트하게 붙어도 결국에는 슈팅루트와 각도를 찾아내어 골을 성공시켰다. 이렇게 가드와 포워드를 자유자재로 옮기는 거빈을 보고 사람들은 스윙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야말로 최초의 스윙맨인 셈.[4] 거빈의 득점력은 대단했는데 특히 1978년 벌어진 데이비드 톰슨과의 득점왕 대결은 백미로 꼽힌다. 거빈의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데이비드 톰슨은 73점을 꽂아넣어 거빈으로부터 58점을 앞선 상태였는데, 거빈은 긴장 때문인지 첫 여섯번의 야투를 모두 날려버렸지만 이후 침착을 되찾고 1쿼터에만 20득점, 2쿼터에는 무려 33득점[5]을 득점한 거빈은 그날 경기에서 63득점을 기록해서[6] 득점왕에 등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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