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수 50인 no.22 빌 월튼
- no.22 빌 월튼
- 2016년 11월 21일
- 9분 분량

카림 이후 최고의 대학 농구 선수 William Theodore Walton은 195년 11월 5일, 캘리포니아의 La Mesa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농구 센스를 발휘한 소년 월튼은 Helix 고등학교 재학 시부터 전국 대학농구 감독들의 스카우트 표적이 되었고, 결국 치열한 경쟁 끝에 명장 존 우든이 이끄는 UCLA가 월튼을 얻었습니다. 당시 월튼이 어찌나 뛰어난 선수였던지, 우든 감독은 2학년 이상 및 그 해 스카우트한 내로라하는 센터들을 상대로 ‘우리 팀에는 월튼이 들어오니까 대학 시절 동안 후보로 지내는 것을 양해해 달라’ 고 사정해야 했다고 합니다. 월튼은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학 시절 3년 연속으로 NCA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팀에게는 재학 중 통산 성적 86승 4패와 2번의 NCAA 토너먼트 챔피언십을 안겼습니다. 특히 73년 멤피스 주립대를 상대로 펼친 NCAA 챔피언십 경기에서는, 22개의 야투 중 21개를 넣으며 44득점을 올리는 믿어지지 않는 활약을 펼쳤습니다. 월튼이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 초반은 미국 전역에 베트남전 반대의 목소리와 히피 문화가 물결치던 때였고,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아들이던 청년 월튼 역시 이러한 물결을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시위대와 함께 행정기관과 도로를 점령했고 수업을 방해했으며 닉슨 대통령과 FBI를 비난했습니다. 농구 코트가 영적인 교화의 장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 월튼은, 채식주의를 고집했으며 플란넬 셔츠를 입고 장발을 휘날리며 헤어밴드와 어니언 백을 착용하고 밴드에 열광하는, 그 당시의 많은 청년과 같은 히피였습니다. 결국 월튼은 격렬한 시위에 참여한 끝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수갑을 찬 채로, 월튼은 몰려든 기자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기성세대와 시대에 대한 반골 정신이 가득 찬 그 성명서의 끝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결국 당신네 세대들이 세상을 말아먹었다. 우리 세대가 그것을 바로잡겠다. 돈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돈으로는 행복을 살 수 없다. 나는 단지 행복해지고 싶을 뿐이다.’ 우든 감독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열정이 넘치는 이 빨강머리 청년은 1973년 미국 최고의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설리번상을 받았습니다. 농구 선수가 이 상을 받은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1965년 빌 브래들리가 처음으로 수상했고, 월튼 이후로 이 상을 받은 농구선수는 33년 후인 올해의 J.J. 레딕이 유일합니다. 월튼 본인도, 감독도, 농구팬도, NBA에서의 성공을 자신했습니다. 비록 고등학교 때 당한 왼발 골절상과 그로 인한 대학 시절의 무릎 및 등 통증이 있었지만, 그런 사소한 병력을 중요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대학 선배인 카림 압둘 자바를 비록하여 윌트 체임벌린, 빌 러셀의 뒤를 잇는 NBA의 지배자가 될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분명 그래야 했습니다. 마침내 NBA 입성, 그리고 시작된 불행 1974년 드래프트, 전년도의 형편없는 성적으로 1번 지명권을 얻은 리그의 풋내기 팀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는 아무 망설임도 없이 UCLA 센터 빌 월튼에게 지명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는 개인의 실력은 물론 팀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까지 검증된 그 해 드래프트의 최대어였고, 포틀랜드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습니다. 팬들은 1970년 창단 이래 비로소 프랜차이즈 스타감이 들어왔다며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첫 7경기는 좋았습니다. 그 7경기에서 월튼은 평균 16득점, 19리바운드, 4.4어시스트, 4블록의 대활약을 펼쳤습니다. 게다가 엄청난 패싱 능력과 수비력을 보여줬습니다. 리그에서 별 볼일 없는 팀 중 하나였던 포틀랜드가 소란스러워졌습니다. 팬들은 월튼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월튼은 미디어의 집중 조명을 받았습니다. 비록 대학 시절의 독설과 반골 기질은 여전했지만, 모든 것이 잘 되는 상황에서는 그것조차 매력으로 보였습니다. 왼발이 고장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월튼은 시즌 개막 후 단 7경기만 치른 상황에서 부상자 명단에 올랐고, 결국 남은 75경기 중 28경기만을 뛰는 데 그쳤습니다. 1968년의 웨스 운셀드 이후로 신인왕-MVP 동시 수상의 신화가 기대됐지만, MVP는커녕 신인왕마저 UCLA 팀메이트였던 자말 윌크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듬해인 1975-76 시즌 월튼은 평균 16.1 득점에 13.4 리바운드를 기록했지만, 전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발 부상으로 인해 51경기만을 출장했습니다. 부상은 기록과 상관없이 그가 팀에 미쳐온 영향력을 앗아가 버렸고, 팀은 퍼시픽 디비전 최하위를 기록하며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팬들의 시선은 점차 싸늘해졌고, 여전히 날카로운 독설 역시 더 이상 매력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감독이 경기가 끝난 후 ‘잘했어’라고 말하자 ‘당신이나 잘하쇼’ 라고 쏘아붙이는 등, 월튼은 모든 이들로부터 고립되어갔습니다. 빨강머리 센터의 전성시대 하지만 모든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월튼의 재능은 녹슬지 않았습니다. 부상에서 어느 정도 회복한 1976-77 시즌, 65경기에 출장한 월튼은 평균18.6점을 기록하며 부활했고, 14.4개의 리바운드와 3.25개의 블록 두 부문에서 리그 1위에 올랐습니다. 역사상 한 시즌에 리바운드와 블록에서 모두 1위에 오른 선수는 월튼을 비롯하여 카림 압둘-자바, 하킴 올라주원, 벤 월러스 단 네 명에 불과할 정도니 월튼의 기록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부활한 월튼은 NBA Second Team과 All NBA Defensive First Team에 선정되었습니다. 26 득점, 13 리바운드를 기록하며 퍼스트 팀에 선정된 압둘-자바에 버금가는 성적이었죠. 당시 포틀랜드는 명장 잭 램지 감독의 지휘 하에 포인트 가드 라이오넬 홀린스, 그리고 시즌 평균 20.2득점, 11.4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월튼과 함께 더블포스트를 이룬 모리스 루카스를 중심으로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안정된 모습을 보였습니다. 결국 전 시즌 37승에 그쳤던 포틀랜드는 12승이 향상된 49승을 기록하며 레이커스에 이어 퍼시픽 디비전 2위에 올랐고, 서부 3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아티스 길모어가 버틴 시카고를 1라운드에서 2-1로 누른 포틀랜드는 위대한 슬램덩커 데이빗 톰슨의 덴버를 4-2로 따돌렸고,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그 해 리그 최고 승률 팀이자 월튼의 대학 선배 카림 압둘-자바가 뛰는 레이커스를 스윕해 버리며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파이널 상대팀은 닥터 J의 필라델피아 76서스. 당시 필라델피아에는 슈퍼 에이스 닥터 J를 비롯하여 건실한 스코어러 조지 맥기니스와 더그 콜린스, 속공 패스의 달인 헨리 비비, 그리고 베테랑 센터 대럴 도킨스와 그를 보좌하던 칼드웰 존스 등 능력 있는 선수들이 있었고, 벤치에는 닥터 J 의 백업인 코비의 아버지 조 브라이언트가 있었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첫 경기는 월튼이 28득점-20리바운드를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33득점을 쓸어넣은 닥터 J를 막지 못해 107-01로 패배했습니다. 2차전은 월튼이 도킨스와 존스에게 막히며 일찌감치 승부가 기울고 말았죠. 2차전에서는 난투극까지 벌어져 양 팀이 모두 벌금을 내기도 했습니다. 두 경기를 모두 내준 포틀랜드는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3차전에서 월튼은 20득점, 18리바운드, 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을 129-107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이 경기에서 4쿼터에만 42점을 몰아넣는 엄청난 공격력을 선보인 포틀랜드는 4차전 역시 월튼의 파울 트러블에도 불구하고 130대 98로 압승하는 등 홈에서 열린 두 경기를 모조리 승리하며 균형을 맞췄습니다. 다시 필라델피아로 돌아가 치른 원정 5차전(당시는 홈 코트 어드벤티지가 1,2,5,7차전에 적용). 한번 폭발한 포틀랜드의 트랜지션 오펜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포틀랜드는 이번에는 3쿼터에 40득점을 기록하며 110-104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닥터 J는 37득점을 올리며 분전했지만 월튼과 루카스가 나란히 20-10을 기록한 포틀랜드를 누르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마침내 시리즈를 역전시킨 포틀랜드는 홈 코트에서 첫 우승의 기쁨을 만끽할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시작된 운명의 6차전, 필라델피아는 40득점을 기록한 닥터 J를 앞세워 파상공세로 밀고 들어왔고, 포틀랜드는 월튼을 중심으로 한 패싱 게임으로 맞섰습니다. 게임 종료까지 8초, 포틀랜드는 109-107로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고 공격권은 필라델피아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한 번의 공격, 이 날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닥터 J는 골밑 돌파를 시도했지만 그의 슛 코스는 이미 월튼이 장악하고 있었고, 닥터 J는 할 수 없이 점프슛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실패. 월드 프리가 리바운드를 잡아 다시 슛을 던졌지만 다시 노골. 이어진 조지 맥기니스의 슛까지 림을 외면했고, 월튼이 리바운드 볼을 꼭 끌어안으며 포틀랜드는 팀 역사상 처음이자 유일한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날 20득점, 23리바운드, 8블록, 7어시스트를 기록한 월튼은 파이널 MVP를 수상하며 그의 전성기가 도래했음을 전 세계에 외쳤습니다. 다음 시즌, 월튼과 포틀랜드의 앞길을 막을 자는 없어 보였습니다. 포틀랜드는 개막 후 60경기가 지난 시점에서 50승 10패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서부 컨퍼런스 2위인 피닉스의 최종 성적이 49승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적이었죠. 지난 시즌 올스타에 선발됐으나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월튼은 생애 최초로 올스타전에 출장하여 15득점-10리바운드를 기록했습니다. 필라델피아와의 리턴 매치 역시 대승을 거둬, 포틀랜드는 2연패를 예약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거칠 것이 없었던 월튼을 또다시 주저앉힌 것은 역시 왼발 부상이었습니다. 월튼이 없는 포틀랜드는 더 이상 최강팀이 아니었습니다. 시즌 마지막 20경기에서 포틀랜드는 8승 14패에 그쳤습니다. 초반에 벌어놓은 승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여유 있게 서부 컨퍼런스 1위를 차지했지만, 포스트 시즌을 앞둔 팀의 분위기는 무겁기만 했습니다. 월튼이 팀의 승리에서 차지하는 ‘가치’를 역설적으로 증명하듯이, 월튼은 생애 최초로 MVP를 수상했습니다. 시즌 기록은 58경기 출장에 평균 18.9득점, 13.2리바운드, 5어시스트, 2.52블록. 그는 지금까지 MVP를 수상한 시즌에 가장 적은 경기를 뛴 선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애틀과 맞붙은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 월튼은 진통제 투혼을 감행하며 1차전을 출전했지만 팀은 105-94로 패배했습니다. 2차전은 113-89로 대승했지만, 월튼은 경기 직후 X레이 촬영에서 왼발 주상골 골절(발등 뼈가 부러졌다는 뜻입니다) 판정을 받고 더 이상 출장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포틀랜드는 4-2로 시애틀에게 시리즈를 내주며 2연패의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시즌 종료 뒤 월튼은 포틀랜드 구단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며 구단을 맹비난했습니다. 그는 ‘운동가’ 또는 ‘운동업자’ 잭 스캇의 도움을 받아 포틀랜드 구단을 고소했고, 이 소송은 월튼이 통째로 결장한 1978-79 시즌 내내 이어졌습니다. 비록 합의하기는 했지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린 월튼과 포틀랜드는 이별을 준비했고, 마침내 월튼은 포틀랜드 팬들의 야유를 뒤로 한 채 샌디에이고 클리퍼스로 이적했습니다. 하지만 클리퍼스행은 또다른 고통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먹튀 월튼’ 클리퍼스는 월튼을 데려오기 위해 당시 신기록인 7년간 7백만달러의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게다가 월튼 영입의 댓가로 포틀랜드에 주전급 선수 두 명과 현금, 1라운드 지명권을 내줘야 했습니다. 그 반작용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선수 이적이 활발하지 않았던 당시 NBA에서 그 정도의 엄청난 이동은 클리퍼스 선수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3년 전 파이널에서의 앙금이 가시지 않은 월드 프리는 ‘이건 팀을 붕괴시키는 처사다. 마치 가족이 죽은 것 같다’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월튼은 되도록 유연하게 대처하려 노력했습니다. 선동적 운동가인 잭 스캇과의 관계를 끊었고 수염을 깎았으며 채식주의를 포기하는 등 제도권에 적응하려 노력했으며, 기자들과의 관계도 개선했습니다. 그가 그동안 인터뷰를 마음대로 거절한 것을 사과하며 밝힌 이유는 ‘말더듬증’. 현역 시절 말더듬증을 겪었던 사람이 오늘날의 명 해설자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죠. 물론 월튼은 치료를 통해 말더듬증을 고쳤습니다. 월튼의 이러한 노력과는 상관없이, 부상은 생애 최악의 형태로 월튼을 때려눕혔습니다. 이적 첫 시즌인 1979-80 시즌 시범경기에서 무릎 부상이 재발한 월튼은 그 해부터 세 시즌 동안 단 14경기만 출장했습니다. 팀 성적은 곤두박질쳤습니다. 클리퍼스는 웃음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고, 선수들은 이를 참지 못했습니다. 월튼은 선수들에게서 먹튀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농구를 시작한 이래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오던 월튼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마침내 월튼은 선수 생명을 걸고 발 수술을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발등에 아치형 보형물을 넣어 착지시의 충격에서 주상골을 보호하는 수술이었죠.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월튼은 회복 기간 동안 로스쿨을 다니거나 테니스를 하며 몸을 만들어 갔습니다. 마침내 1982-83 시즌 코트에 돌아온 월튼은 1주일에 1경기만을 출전하며 부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평균 14.1득점과 야투율 52.8%를 기록했고, 무엇보다 고통 없이 뛰었습니다. 이후 2년 동안 월튼은 경기수를 점차 늘려나가며 ‘밥값’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클리퍼스 선수들도 더 이상 그를 먹튀라 할 수 없었습니다. 이 때 월튼의 나이는 32세, 자신의 선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은 월튼은 다시 한 번 챔피언이 되고 싶었습니다. '레전드의 자질을 가졌으나 부상으로 부진하다가 재기해 성공해 행복하게 은퇴한 선수'로 경력을 끝내기에는 자신이 한때 올라봤던 산이 너무 높았습니다. 월튼은 강팀으로의 이적을 결심했습니다. 월튼의 ‘뉴 딜'-여섯 번째 셀틱 프라이드가 되다 1985년 당시 리그는 동부의 보스턴 셀틱스와 서부의 L.A. 레이커스가 양분하고 있었습니다. 월튼은 두 팀을 모두 방문한 후 보스턴으로의 이적을 결정했습니다. 농구를 시작한 이래 캘리포니아에서만 농구를 해온 월튼이었고 전년도 우승팀이 레이커스였기에, 모든 사람들은 월튼이 고향 팀인 레이커스에 입단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월튼은 보스턴에서 새로운 농구 인생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하프코트에서 포스트를 이용한 패싱 게임을 즐겨 하는 보스턴의 팀 컬러가 자신과 맞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어린 시절의 우상인 아워백 감독이 보스턴 단장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워백은 월튼을 만난 자리에서 반드시 우승 트로피를 안겨주겠다고 다짐했고, 월튼은 우상의 약속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월튼은 캘리포니아에서의 20여 년에 걸친 선수 생활을 뒤로 한 채 농구 인생의 신천지, 보스턴으로 향했습니다. 보스턴으로써도 빼앗긴 타이틀을 되찾기 위하여 마지막 퍼즐 조각 한 개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그 한 조각을 위해 어떤 댓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스턴은 월튼을 영입하는 댓가로 주전 포워드인 세드릭 맥스웰과 현금, 그리고 1라운드 지명권을 클리퍼스에 넘겼습니다. 보스턴에서 월튼을 기다리고 있는 임무는 생애를 통틀어 매우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그의 자리는 다름아닌 식스맨. 래리 버드-케빈 맥헤일-로버트 패리쉬의 초강력 프론트라인을 지녔음에도 카림 압둘-자바를 막지 못해 1985년 챔피언 트로피를 넘겨줘야 했던 보스턴은 농구 센스가 뛰어나고 패싱과 수비가 좋은 월튼이 백업 센터로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엘리트였던 월튼에게 벤치는 생소한 자리였지만, 그래도 그는 그 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보스턴 가든에서의 데뷔전, 월튼이 코트에 등장하자 보스턴 팬들은 그에게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월튼이 식스맨을 보면서 월튼과 보스턴은 모두 긍정적 효과를 얻었습니다. 먼저, 월튼의 출장 시간이 줄어들면서 그의 플레이에 집중력이 생겼습니다. 월튼의 평균 출장 시간은 19분에 불과했지만 생애를 통틀어 가장 많은 80경기에 출장했으며, 그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었습니다. 월튼은 그 시즌 평균 7.6득점, 6.8리바운드, 2.1어시스트, 1.33블록을 기록했습니다. 두 번째로 맥헤일의 기량이 만개했습니다. 주전으로 승격한 전년도-전전년도 식스맨상 수상자 맥헤일은 생애 최초로 평균 득점 20점을 넘기며 대활약했고, 버드-맥헤일의 백인 포워드 듀오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세 번째로 보스턴의 플레이에 유연함이 더해졌습니다. 팀에 단 한번의 강력한 수비가 필요할 때나 패싱 게임이 필요할 때, 주전 선수가 난조를 보일 때 감독 K.C. 존스는 월튼을 투입했고, 탁월한 농구 센스로 경기 전체를 읽고 있던 월튼은 감독이 부탁한 임무를 반드시 수행했습니다. 월튼은 56.2%라는 영양가 만점 야투율을 기록했고, 주전 5명이 패싱게임에 능했던 보스턴 공격을 막아야 했던 상대팀을 더욱 난감하게 했습니다. 결국 보스턴은 래리 버드의 전무후무한 MVP 3연패와 시즌 67승을, 월튼은 식스맨상을 수상하여 월튼과 보스턴의 ‘뉴 딜’은 윈-윈의 결과를 낳았습니다. 시련을 이겨내고 고등학생처럼 환호하다 최강팀의 자부심을 지닌 채 맞이한 1986년 플레이오프. 보스턴은 1차전에서 조던의 시카고를 맞아 63득점 ‘God 쇼’의 희생양이 되긴 했지만, 비교적 무난하게 시리즈를 스윕했습니다. 2라운드에서 도미니크 윌킨스의 애틀랜타를 4-1로 짓밟은 보스턴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밀워키마저 스윕한 후 파이널 상대를 기다렸습니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파이널 상대는 레이커스가 아닌 랄프 샘슨-하킴 올라주원 트윈타워의 휴스턴 로케츠. 시리즈의 촛점은 카림 압둘-자바를 잠재운 휴스턴의 트윈타워를 보스턴의 프론트진이 막아낼 수 있을 것인지에 집중됐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월튼과 보스턴 선수들은 반드시 타이틀을 찾아올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보스턴 가든에서 펼쳐진 1차전, 트윈타워의 한 축을 무너뜨리라는 명령을 받은 패리쉬와 맥헤일, 그리고 월튼은 비교적 기복이 심했던 랄프 샘슨에게 달려들었고, 결국 샘슨을 전반 4반칙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습니다. 홀로 남은 올라주원이 33점, 12리바운드로 분전했지만 66%의 야투율을 기록한 보스턴의 패싱 게임을 홀로 막아내기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보스턴은 첫 경기를 112-100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2차전 역시 올라주원이 맹위를 떨쳤지만 패싱 마인드가 아직 없던 올라주원은 패리쉬와 월튼의 강력한 압박에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결국 버드가 31점, 8리바운드, 7어시스트, 4스틸, 2블록을 기록하며 3쿼터 34-19 런을 이끌어낸 보스턴이 117-95로 2연승을 기록했습니다. 휴스턴은 3차전에서 24점-22리바운드의 샘슨을 앞세워 106-104 승리를 기록했지만, 4차전에서는 휴스턴 트윈타워를 22점, 10리바운드로 묶은 패리쉬와 월튼의 활약으로 106-103 승리를 거둡니다. 코너에 몰린 휴스턴은 5차전에서 샘슨과 보스턴 백업 가드 제리 시칭의 난투극에 이은 동반 퇴장으로 패배가 확실해 보였지만, 32점, 14리바운드, 8블록을 기록한 올라주원의 활약에 힘입어 111-96의 대승을 거둡니다. 한 경기 차로 쫓기게 되었지만 보스턴 선수들은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6차전은 보스턴 가든에서 열릴 예정이었고, 그 해 보스턴의 정규시즌 및 포스트 시즌 홈경기 전적은 49승 1패였기 때문이죠. 예상대로 보스턴은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했습니다. 시리즈 두 번째 트리플더블을 기록한 버드는 전반에만 16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했고, 보스턴은 전반을 17점차로 리드하며 사실상 승부를 결정지었습니다. 마침내 114-97로 승리한 보스턴은 팀 역사상 16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됩니다. 월튼에게는 생애 두 번째의 영광이었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이겨낸 월튼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습니다. 당시 보스턴 해럴드는 맥헤일의 인터뷰를 통해 월튼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나이든, 스포츠 역사상 가장 부상에 시달린 몸을 가진 남자가 고교생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다. 그것은 재미있기도 하고 동시에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의 모든 경기는 도전이었고, 그는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잊지 않게 만들어줬다.’ NBA의 타키투스 이듬해인 1986-87 시즌, 생애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한 몸은 월튼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주지 않았고, 이미 소망을 이룬 월튼은 10경기를 뛴 시점에서 미련 없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991년 TV 해설자로 변신한 월튼은 대학 농구 중계를 통해 선수시절의 걸쭉한 입담을 자랑했고, 현재는 NBA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의 독설은 오늘날에도 당사자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2003년에는 유타 재즈의 시즌 전망에서 ‘샌안토니오 스퍼스 벤치멤버들을 보는게 재즈 게임을 보는것보다 재미있을 것’ 이라고 말해 재즈 팬들을 격분시켰으며 잦은 코칭스태프 교체로 말이 많던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를 향해서는 ‘어차피 금방 자를 거 뭐하러 감독을 고용하나?’ 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크리스 웨버가 덩크를 실패하자 중계석에서 ‘잠이 덜 깨서 그렇다’ 라고 말해 웨버를 분노시키기도 했죠. 그는 NBA 사무국, 심지어는 자신을 고용한 방송사에 까지 거침없는 독설을 퍼붓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이미 월튼 어록까지 나왔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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