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선수 50인 no.21 빌리 커닝햄
- no.21 빌리 커닝햄
- 2016년 11월 21일
- 2분 분량

빌리 커닝햄은 선수보다 지도자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커닝햄은 83년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를 우승으로 이끌며 명장 반열에 올랐다. 1977년부터 85년까지 팀을 맡으면서 454승196패(0.698)의 성적을 기록했고, 이 기간동안 필라델피아는 디비젼 2위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커닝햄이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으로 진학했을 때 딘 스미스가 신임 헤드코치로 부임했었다. 커닝햄은 스미스의 전임자였던 프랭크 맥과이어가 뽑은 선수였다. 스미스의 눈에 비친 커닝햄은 거의 형편없는 선수였다. 스미스는 "마치 걸을 수 조차 없게 생긴 이 친구가 무슨 농구를 한단 말인가"라며 탄식을 내뱉을 정도로 커닝햄의 첫 인상이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캥거루 키드'라는 별명처럼 커닝햄은 ACC를 주름잡는 대선수로 성장했고, 프로에도 1라운드에 지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65년 프로에 입문한 왼손잡이 커닝햄은 뛰어난 점프력으로 벤치에 활력을 불어넣어줬다. 66-67시즌 68승13패를 기록한 필라델피아는 스타 군단이었다. 윌트 체임벌린을 비롯해 루크 잭슨·할 그리어·쳇 워커·월리 존스가 탄탄한 선발 라인업을 구축했고, 커닝햄과 래리 코스텔로·데이브 갬비 등이 백업진이었다.
특히 67년 파이널은 커닝햄의 진가가 발휘된 무대이기도 했다. 커닝햄은 릭 배리의 샌프란시스코 워리어스(현 골든스테이트)와 가진 파이널 6차전서 4쿼터에만 13점을 몰아넣으며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68-69시즌 체임벌린이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출장 시간이 늘어난 커닝햄은 평균 20점과 10리바운드를 모두 넘기는 1급 선수가 됐다.
71-72시즌이 끝난 뒤 커닝햄은 ABA 캐롤라이나 쿠거스로 이적했다. 커닝햄이 떠난 뒤 필라델피아는 72-73시즌 9승73패라는 참담한 성적으로 역대 최악의 기록을 남기게 된다. ABA에서 MVP에 뽑히기도 했던 커닝햄은 74-75시즌 다시 필라델피아로 복귀했고, 75-76시즌 도중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은퇴하고 만다.
이후 77년 진 슈에 이어 필라델피아 사령탑을 맡은 커닝햄은 헤드코치 경력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잠재력 넘치는 필라델피아를 동부의 강호로 이끌었다. 줄리어스 어빙, 조지 맥기니스, 덕 콜린스, 대럴 도킨스, 바비 존스 등이 있었던 필라델피아는 가장 화려한 팀으로 거듭났다. 승률은 좋았지만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와 LA 레이커스의 벽에 막혀 우승을 못했던 필라델피아는 82-83시즌 휴스턴 로키츠에서 모제스 말론을 영입하며 마침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코치직을 그만둔 뒤 CBS의 해설가로 활동했던 커닝햄은 87년 마이애미 히트의 창단에 산파 역할을 했다. 마이애미는 91-92시즌 익스팬션 동기 4팀(미네소타 팀버울브스, 올랜도 매직, 샬럿(현 뉴올리언스) 호니츠)가운데 가장 먼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선수로 지도자로 구단 관계자로 성공의 만루홈런을 계속 날렸던 커닝햄의 등번호 32번은 필라델피아의 영구결번중 하나다.
Comments